인간의 마음은 간사하다.
사람들과 얽히는 게 괴롭다가도
혼자인 시간이 지속되면 외로움을 느낀다.
피곤하다, 지겹다, 저 사람은 왜 저럴까 하다가도
어느새 그렇게 되뇌었던 말들을 다 잊어버리게 된다.
추위에 떨고있는 고슴도치 두 마리는 결정을 해야 한다.
너무 추워 서로 껴안으려 하면 서로의 가시에 찔리게 되고
가시에 찔릴까 서로 떨어지려 하면 추위에 떨어야 한다.
둘 중 누구도 피해가 없는 적당한 거리라는 게 존재할까?
계속 가시에 찔리면 상처가 생기고
계속 추위에 노출되면 병이 생긴다.
어린시절엔 몸에 가시가 채 나질 않아서 서로 껴안으려 해도 가시에 찔리지가 않는다.
조금씩 성인이 되면서 각자 살아온 환경에 따라 가시의 크기와 강도가 달라진다.
가시에 찔리는 걸 감안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어떤 대안을 선택한 걸까?
계속 상처가 나고 아물기를 기다리는 걸 반복하는 걸까?
아니면 그들에게 가시에 찔리는 정도의 상처는 아무것도 아닌 걸까?
사실 난 추위에 적응하려 노력하는 쪽에 가깝다.
아니면 그냥 추위가 없는 따뜻한 장소를 찾아가도 된다는 생각도 하고 있다.
그런 장소가 어디에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말이다.
근데 나도 간사한 인간 중 하나인지 어느 땐 또 가시에 찔리는 게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기도 한다.
그럼 어떤 선택을 해도 결국 불행한가?
생각해 보니 어릴 땐 굳이 행복을 찾으려 하지 않았었던 것 같다.
불행을 모르니까 행복의 필요도 몰랐다.
살면서 아는 게 많아질수록 가시가 단단하게 성장하는 것 같다.
내 가시가 단단하고 커질수록 타인은 나에게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
물론 배움과 깨달음을 통해 내 가시를 유연하게 만드는 방법도 있었다.
근데 상대방의 가시가 단단한데 내 가시만 유연해지는 건 의미가 없다.
내가 그랬듯 배움과 깨달음을 통해 가시를 유연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근데 그게 쉽지가 않다.
가시는 겉으로 보기엔 그 강도가 단단한지 유연한지 첫눈에 구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그 사람과 상호작용 하는 모습을 본 후에야 그 강도가 조금씩 보이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 상호작용들을 본 사람들은 그걸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길 좋아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게 꽤 재밌으니까. 누가 가시에 찔렸고 상처를 받았고 하는 그런 것들 말이다.
사실 난 그게 재밌는지 잘 모르겠어서
그냥 따뜻한 장소가 혹시 어디 있진 않을까를 생각하며 사는 중이다.
-이 혹독한 추위 속에서 입김을 호호 불면서 하는 내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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