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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한 것들/사색들

회고록 part.1

by 흑백인간 2023.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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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각자 본인이 처한 시기에 따라 미래에 바라는 간절함은 다르다.

취업을 못하고 있을 때 취업에 대한 갈망은 꽤나 간절했다.

생각해 보면 27~28의 나이라 괜찮은데도 그때는 늦었다고 조바심을 냈었다.

왜냐면 20대 초중반 대부분의 시간을 거의 놀면서 지낸 나였기 때문이다.

신기한 건 놀면서 지냈던 당시엔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는지 별 걱정이 없었던 것 같다.

시간이 흘러 20대 후반즈음에 주변 친구들이 하나 둘 자리를 잡는 걸 보고는 지레 겁을 먹었던 것 같다.

"아 이거 나만 도태되는 거 아닌가?" , "20대 초중반에 너무 놀았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현실을 직시하고 뭔가 노력을 해야겠다고 느낀 순간이.

  

취업준비생 시절 웃겼던 건 주변 친구들 중 몇몇은 취업준비 편히 하라고 부모님께 차를 받기도 하고

용돈도 받으면서 취업준비 스터디에 들어가 밥도 같이먹고 연애도 하는 케이스가 꽤 있었다.

또 친한 친구 중 한 명은 부모님 지원을 받아가며 무려 공무원 시험 준비만 6~7년을 했다. 

 

그에 비해 난 큰 지원이 없었기에 집 근처 시립도서관을 뚜벅이로 다녔고 밥도 집에 와서 먹어야 했다.

애초에 공무원시험을 준비한다는 것조차 내겐 사치였다. 그냥 하루빨리 월급쟁이 직장인이 되고 싶었다.

도서관에서 취업준비를 위한 공부를 하는 중간중간 괜스레 부모님이 야속하게만 느껴지기도 했다.

근데 아마 부모님 지원이 있었다면 되려 준비를 게을리하거나 친구들과 어울리며 더 놀았을 것 같다.

 

취업준비에 나름 많은 노력을 했는지 어찌어찌 제약회사에 엔지니어로 취업을 하게 됐다.

자격증 덕인지 지원할 수 있는 업종이 많았고 실제로 지원도 많이 하고 면접도 많이 봤었다.

나름 인지도 있는 중견급 회사(라면회사, 식품회사)에 합격통보도 받았었다. 

근데 제약회사에서 일해야 겠다는 결정을 하게 된 이유가 지금 생각 봐해도 참 병신 같다.

어렸을 때 '레지던트이블'이라는 좀비영화를 재밌게 봤는데 그 배경이 제약회사다.

정확히는 제너릭을 만드는 일반 제약사가 아닌 생물학적 제제를 만드는 바이오회사라고 보면 되는데

'엄브렐라'라는 회사 직원들이 좀비바이러스를 만들다 잘못해 밖으로 유출?되는 내용이었나.

암튼 이런 비현실적 공상을 의사결정에 반영하면서 상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근데 이런 생각은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하게 됐지 당시엔 나름 이성적인 결정이라 생각했다.

 

취업을 하고도 내가 겪는 일상이 어떤지, 힘이 드는지, 비전이 있는지는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내가 직업이 있다는 것 그리고 남들 눈에도 직장을 다니는 평범한 사회인으로 보인다는 게 중요했다.

취업이 어떻고 하는 시대에 무언가 모자라서 아직 취업을 못한 사람으로 보이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그땐 그랬다.

사회가 정하는 틀 안에 어떻게든 들어가려 애썼던 것 같다. 

 

근데 지금은 반대가 됐다.

사회가 정하고 있는 틀을 벗어나려 노력 중이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전부 무색해져 버렸다.

 

#1

제약회사에 유틸리티 엔지니어로 입사하고 약 3년 정도를 일했다.

그 기간 동안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던 내 친구는 계속 공무원시험을 준비했다.

그때 느꼈던 것 같다. 인생을 사는 난이도에 부모의 영향이 꽤 크게 작용한다는 걸.

다행히도 그 친구는 결국 공무원 시험(소방관)에 합격했다.

정확히 내가 3년간의 회사생활을 끝내고 공기업으로 이직할 때였다.

내가 3년간 제조업에 근무하면서 이런저런 사회의 풍파를 겪는 동안 내 친한 친구는

종종 쉬는 시간에 시내 곳곳 드라이브를 하면서 고상하게 공시를 준비했더랬다.

합격사실을 나에게 가장 먼저 알리고 싶다며 내가 사는 동네 근처 공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 친구는 나에게 이제 막 시작하는 사회초년생의 다짐 같은 것들을 함께 하자고 얘기했다.

? 난 이미 사회초년생이 아닌데

그러면서 취업 기념으로 부모님이 보태줬다며 BMW(320D)를 끌고 나타났다.

쉐보레를 타고 있던 나에게 말이다.

 

 #2

제약회사에 다닐 때 스톡옵션(feat.우리사주)이라는 제도를 경험하게 됐었다.

물론 나도 스톡옵션을 받는 대상이었다. 당연히 열심히 일했으니까 아주아주 당연했다.

중요한 건 "스톡옵션=공짜"가 아니다. 돈을 내야 한다.

스톡옵션은 보통 상장가의 절반도 안 되는 가격으로 직원들에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거기에 별개로 우리사주(우리사주조합)라는 제도의 권리행사도 할 수 있는데, 스톡옵션이랑 비슷하다.

다만 제도의 목적이 달라서 스톡옵션만큼 좋은 조건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된다(거의 상장가에 매입)

아무튼 수중에 돈이 없던 난 스톡옵션&우리사주를 갖기 위해 대출을 받아야 했다.

혹시나 돈을 빌려주지 않을까 부모님께 넌지시 물어봤지만 역시나 부정적인 의견을 보였다.

부모님은 스톡옵션이 '주식'이라는 걸 알고 난색을 하셨다. 주식 잘못하면 큰일 난다나?

 

결국 난 몰래 대출을 받았다. 신용대출은 본인 연봉정도가 받을 수 있는 맥시멈이었다.

그렇게 당시 연봉만큼의 대출을 받아 스톡옵션을 최대치 받고 나머지 돈으로 우리사주를 샀다.

임직원 70%정도가 있는 돈, 없는 돈으로 스톡옵션&우리사주 권리를 행사했다.

나머지 30%는 주식에 대한 거부감 때문인지 권리를 포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난 사회초년생을 자동차 대출+주식 대출로 시작한 셈이었다.

그래도 집(부모님)에서 출퇴근하면서 숙식비는 아낄 수 있었는데, 몇 개월 후에 따로 독립을 했다.

이제 내 인생의 크고 작은 결정들로 인해 부모님과 의견이 상충하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사실은 이번일로 더 이상 잔소리 듣는 게 싫었기 때문이었다)

 

#3

모종의 이유로 제약회사를 퇴사(2018년)하고 내가 사는 지역의 지방공기업으로 이직했다.

이직 후 3년 정도가 지난 시점인 2021년에 주식이 400%가 올라있었다(네이버 실검에 오름)

정확히는 코로나19가 시작되고 백신에 대한 내용이 화두가 되기 시작한 2021년 여름쯤이었다.

내가 다녔던 회사 이름을 알고 있던 소수의 지인들에게서의 연락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신기한 건 당시 주변인들의 반응이 내게 안중에도 없을 만큼 큰 정신적 현타를 맞았는데,

당시 오른 주식의 금전적 가치가 제약회사에서 일한 3년 치 연봉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6년 이상 주식을 팔지 않고 기다린 인내도 있지만 결국 돈을 번다는 건 한 순간이었다.

그나마 조금 남아있던 직장생활에 대한 의미와 환상이 완벽하게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4

어쨌든, 결정을 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몇 주를 매도해야 할까? 타이밍은 적절한가?

사실 당시 국내 코로나 백신이 전무했기 때문에(화이자에 의존) 당장의 기대감이 매우 컸다.

결국 주식의 2/3를 매도했다. 나름 가장 안전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당시 내게 있던 빚(대출)을 모조리 상환했다. 

그리고 남은 돈은 가장 안전한 자산이라고 생각했던 부동산(토지)에 재투자를 했다.

지역은 경기도 중 산업으로 인한 개발이 가장 큰 도시 두 군데로 필지 자체를 매입하긴 턱없이 부족해서 일부 지분을 매입했다. 한 곳은 지하철 역사가 만들어지고 있는 주변 농지, 다른 한 곳은 산업단지가 만들어지고 있는 주변 농지였다. 추후에 해당 지자체가 도시개발사업을 추진하면 용도변경을 통해 지가가 상승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단, 예상이 빗나가거나 다른 이유로 투자에 실패한다고 해도 내 생계에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

 

#5

그다음 해, 나머지 1/3의 주식이 더 비상하리라는 내 기대감에 코웃음이라도 치듯 시장은 냉정했다.

화이자, 모더나, 얀센, 아스트라제네카 등등 미친 듯이 백신이 쏟아져 나오면서 주가가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스톡옵션을 매입한 단가가 너무 낮아 손해를 보는 건 아니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또 결정을 해야 하는 시점이었고, 가장 안전한 선택이 뭘까 고민했다. 고민하는 와중에도 욕심이 사라지질 않았다. 혹시 다시 오르지 않을까? 그 욕심으로 지체한 시간 때문에 얼마큼이나 손해를 봤을까 후회가 된다.

마침 전세로 살고 있던 시기에 이사에 대한 스트레스와 불안감을 해소하고 싶은 욕구가 의사결정에 큰 영향을 줬다. 매번 이사를 다닐 때마다 내 지분이 있는 토지의 등기명의인 표시변경을 하는 것도 에너지 낭비라 생각했다. 주택금융공사에서 고정금리로 집값의 70%를 빌렸고 집값의 30%와 리모델링 비용은 나머지 1/3 주식을 매도해서 지불했다. 그리고 조금 남은 여유자금으로 320D를 견제하기 위해 아우디(Q3)를 사버렸다.

 

#6

30대 중반이 지나버린 지금,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적은 나이도 아닌 듯하다.

일단 쫓겨나지 않아도 되는 집이 있고, 짤리지 않는 직장이 있으며, 약간 사치를 부릴 여유(차)도 있다.

물론 부채(대출)도 있고 투자를 목적으로 하는 자산(주식과 부동산)도 여전히 증식 중이다.

경기도의 토지를 매입하지 않았더라면 사실 신축이 아니라서 대출 없이 집을 사는 것도 가능했으리라.

근데 그럼 거기서 끝일 것 같았다. 그냥 그 이후는 월급으로 연명하는 삶일 것 만 같아 그게 더 두려웠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면서 계속 투자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가지고 있던 스톡옵션을 포함한 국내주식을 전부 매도해 버리고 미국지수를 추종하는 ETF로 갈아탔다.

그리고 현재는 재테크 성격을 갖는 투자 외에 현금흐름을 창출할 수 있는 방법을 계속 고민하고 있다.

왜냐면 회사를 다니기 싫기 때문이다. 이제 많이 편해진 연차고 워라밸 나름 괜찮은데도 다니기가 싫다.

(더 논리적인 이유는 투자에 실패해도 금세 회생할 수 있는 현금보유능력을 갖추기 위함 퇴사해도 됨)

 

#7

이제까지의 삶은 내 의사결정능력에 비해 운이 좋았던 것 같다.

병신같이 레지던트이블 생각하면서 제약회사에 입사하지 않았다면 중견기업을 다녔을 거였다.

근데 그 정도 인지도 좋은 기업은 스톡옵션이나 주식에 대한 경험을 할 수 없었을 거였다.

사실 근무자체가 3조 3교대란 말을 듣고 가기 싫었다. 왠지 노예로 전락하는 느낌이었으니까.

태생자체로 취향이 고상해서 약간 없어 뵈는 일이나 남에게 굽신 거리는 일은 못하는 나다.

 

#END

회고록 파트1은 대략 2013년~2023년 내 삶의 큰 전환점이 될만한 이벤트를 기록한 글이다.

파트2는 경기도에 투자한 토지의 지가상승분이 내 예상 수익률에 근사한 수준으로 회수가 될지,

그리고 월급을 대체할만한 현금흐름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지 여부에 따라 쓸지 말지가 결정될 것 같다.

아마 2023년~2033년 정도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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